성경 연대기 (창조-심판)舊(구)컴 관련 자료실

2002/03/21 (16:42) from 211.54.99.22' of 211.54.99.22' Article Number : 20
Delete Modify 朴 俊 珪 (jk_park1128@hanmail.net) Access : 9947 , Lines : 40
에덴의 상징(1. 선악과와 성령의 役事)


에덴 이야기의 실제적 사실을 확인해 보려고 많은 학자들이 지난 세월을 통해서 수고를 하였다고 한다.
유프라데스강 유역을 파보기도 하면서 많은 고고학자들은 수고를 하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했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성경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고 지금에 와서는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성도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불신의 시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매우 많은 상징을 가지고있는 이야기로써 그 상징은 믿음이라는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어느 것도 대입이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의 役事 的 측면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상징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에 와서는 성경이 학문적으로 다뤄지는 경향으로 흐르고있고 이런 흐름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는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가하면 수십 년 전 만해도 성경을 논하는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들은 입에도 오르지 않았고 다만 성경이 가지고있는 意味와 성도의 삶을 연결하는데 주력함으로 은혜 적인 측면으로는 충분함을 얻었었다.
그러므로 지난 100년의 시간을 통해서 한국의 기독교는 급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는 성경을 논하면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원어의 意味이고 원어를 모르면 논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가 되어있고 그들은 그런 원어를 통하여 성경의 오류를 파헤침으로 성도들이 가지고있는 믿음에 문제까지 주고있는 것이다.
물론 원어학 교육이 보편화됨으로서 가져오는 이로움도 있겠지만 성경이 주는 意味로보면 오히려 문제를 가져온 결과로서 성경의 발전이 성령의 役事를 통한 발전이 아니고 학문적인 발전을 통해서 이루려는 문제를 낳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성경의 발전이 학문적인 측면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에덴이라는 상징이 가지고있는 공식에 대입해 보고자한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에덴이 가지고있는 공식을 정리하여야하는데 먼저 에덴에는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는 세 종류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다.(창2:9)
그리고 그 에덴을 다스리는 사람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아담이었으며 이 아담은 하나님이 생기를 넣음으로 "생령"이 되었다.
그 다음,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이내 배필을 지으시지 않고 공중의 새와 들짐승을 지으신 후에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시어 아담의 아내가 되게 하셨다.
그 후, 아담이 아내인 여자는 뱀의 꾀임에 넘어가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고 결국 에덴에서 추방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이 성립된다.
첫째는 "에덴"이라는 장소이고 두 번 째는 "아담"이라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세 번째는 "선악과"라는 知識을 상징하는 열매이며 네 번째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추방"된 일이다.
즉, 아담이라는 자녀는 추방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이것은 지금 오늘을 사는 성도가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意味하는 것으로 곧, 성령이 役事함을 意味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그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役事와 歷史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성도에게 어느날인가부터 하나님이 役事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무언가 役事할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된 일과 같은 것으로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 하나님과 함께 하였지만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은 선악과가 상징하는 知識이라는 意味와 오늘 役事하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에덴에서 쫓겨나야 하는 아담, 결론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쫓겨났듯이 그 성도에게 役事하지 않음은 그 성도가 선악과와 같은 어떤 知識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징적 意味를 가지고있는 아담과 선악과, 그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될 원인이었고 그런 원인을 아담은 하나님에게 미루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이것은 선악과를 먹게한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다시 토해내지 않겠다는 말이 모두 들어있는 내용인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아담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선악과를 토해 내겠다고 말했다면, 또는 토해 내려고 노력했다면, 더 나아가서 토해냈다면, 그래도 아담은 에덴을 쫓겨났을까?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아담을 쫓아내셨다면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다른 것이다.
한 예로 하나님은 아벨을 죽이고도 숨긴 가인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될까 걱정을 했고, 또 사람을 만나서 죽임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할 때 그를 용서해 주셨고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이었기에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먹은 선악과를 토해내는 아담을 굳이 쫓아내셨다고 보기는 무리이고 아마도 다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에덴의 삶을 지속시켜 주셨을 것이다.
즉, 성령의 役事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던 성도가 어느 날인가 그 役事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스스로의 잘못을 찾아서 아담이 선악과를 토해 내듯이 자신의 知識을 토해내고 온전한 성령의 役事를 구한다면 그에게 役事하시던 하나님의 役事는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知識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경을 알려는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役事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고 아담이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세상으로 쫓겨났듯이 그 또한 성령의 役事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즉, 그 성도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知識을 틀 안에 하나님을 넣어 놓고 분석하려는 우를 범하는 것으로 그렇게 분석할 수 있는 知識도 하나님이 주신 것, 즉, 아담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이는 이 학문적인 知識도 하나님이 갖도록 하셨으니 이렇게 만들어진 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석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순간부터 그는 아담이 에덴을 쫓겨나듯이 이미 성령의 役事에서 멀어진 성도이고 그 성도는 하나님의 役事가 없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틀을 기준하여  세상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정의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이루어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은 선악과를 토해내지 않음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적인 知識을 토해내고 하나님의 役事를 받아들인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곧 바울 사도로써 그에게 가말리아 문하생이라는 知識의 선악과를 가지고있을 때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知識을 분토로 여기고 버렸을 때 비로소 그는 바울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그는 아라비아에서 40일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씻고 또 씻어 새롭게 탄생된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선악과는 과연 무엇인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선악과에 취해있고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따먹은 열매인 선악과와 같은 知識의 틀로 성경을 분석하고있는 것이다.
과연 그 분석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役事로 얻은 智識이 아닌 자신의 학문적 추구로 얻은 知識의 열매로 과연 성경은 분해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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